대한민국, 어떻게 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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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이 월맹과 휴전을 위한 비밀협상에 돌입한 것은 1968510. 그 무렵 미국은 직접 전비(戰費)와 간접 전비를 합쳐 연간 495억 달러(1968), 508억 달러(1969)를 퍼부었고, 주월 미군 병력도 536천명선을 파병할 정도로 개입의 절정을 이루던 시기였습니다. 월남은 독자적인 힘으로 자주국방을 할 의지도 없이 미군의 도움만 요청했고, 이 와중에 정권은 부패와 무능, 내부분열을 거듭했습니다. 무능한 자식에게 돈을 주면 자녀를 더 타락시키는 것과 같은 꼴이었습니다. 의지도 없는 자녀에게 고액과외 시키는 것과 같습니다. 미국은 밑 빠진 독에 물붓기식으로 진행되는 수렁에서 발을 빼기 위해 월맹의 레둑토와 비밀협상을 시작한 것입니다.

 

1973127일 프랑스 파리에서는 5년여 협상 끝에 베트남전을 종식하는 역사적인 휴전회담이 열렸습니다. 이 휴전의 담보를 위해 미국의 키신저는 월맹에 40억 달러의 원조를 제공, 피폐한 월맹의 경제 재건을 돕기로 하고 교전 당사국인 미국·월남·월맹·베트콩 등이 서명했습니다.

미군이 철수하지만 월맹이나 베트콩이 휴전협정을 파기하면 즉각 해·공군력이 개입하여 북폭을 재개하기로 했습니다. 미군은 철수하면서 보유하고 있던 각종 최신무기를 월남에 양도했습니다. 그 무렵 월남 공군력은 세계 4위를 기록하기도 했습니다.

이처럼 철저한 제도와 장치를 마련했기 때문에 키신저는 적어도 휴전체제가 10년은 갈 것으로 낙관했습니다. 미국의 골칫거리였던 베트남전이 휴전되면서 전 세계에는 평화의 바람이 거세게 불었습니다. 닉슨의 데탕트 정책, 한반도에서 1972년부터 시작된 남북대화 등, 세계 평화는 누구도 거스를 수 없는 대세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이런 생각은 착각이었습니다. 월맹은 미군의 북폭과 경제봉쇄로 피폐해져 전쟁수행능력을 상실하였기 때문에 평화회담에 나섰으며, 전략은 변함이 없으되 전술만 약간 바꾼 셈이었습니다.

레둑토가 키신저와 평화회담을 벌이는 한편에선 1950년대 중반에 수립된 대남(對南) 기본전략을 더욱 공고히 다듬었습니다. 그것은 베트남에서 침략군을 몰아내고 민중봉기를 일으켜 인민민주주의 정권을 남반부에 창출하고, 무력으로 남반부를 해방시켜 조국통일을 달성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북한의 대남전략과 한치의 오차도 없습니다.

공산주의자들 앞에 팩트는 힘에 의한 굴복뿐이라는 것이 역사의 교훈입니다.

평화의 레토릭만있었지 평화가 정착하지 않았음에도 그들은 평화시대로 결정하고 행동했습니다.

바보는 모든 상황에서 최선의 상황만을 생각하고 지혜자는 어떤 상황에서도 최악을 고려해 넣습니다.

현 대한민국은 숙주가 똑같은 공산 김일성족이 우리와 평화대화에 응해 무장해제에 성공(?)하고 있습니다. 우리대통령이 북을 방문 백두산에 올라 손을잡고 한라산에 초청하는 평화퍼포먼스는 온 국민을 흥분시키기에 충분했습니다. 그리고 북을 경계하라는 말은 민족에 대한 적대정책을 가진 수구세력으로 몰기에도 좋았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시점에 그들은 핵무기 소형화에 매진했고, 남한공격을 위한 특수부대를 새로 극비리에 창설했습니다.

자유민주주의는 매우 소중한 가치요, 역사는 소름끼치게 반복될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유물론자들이 두려워하는 것은 질량과 총체적 파워뿐입니다.

결국 1973127일 휴전협정이 체결되어 그해 봄에 미군과 한국군이 철수했습니다.

휴전협정 이후 월남은 월맹보다 경제력과 군사력에서 월등히 앞서 있었습니다. 그래서 월남 지도부와 국민들은 낙관했습니다. 월맹군이 도발하면 즉시 미 해·공군이 개입하여 북폭을 재개할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 믿음이 국방을 소홀히 하고, 극심한 정쟁의 원인이 된 것입니다. 휴전무렵 월맹은 오랜 기간의 전쟁으로 인해 매년 80~100t의 식량부족, 물자부족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줄기찬 대남공세는 멈추지 않았습니다. 사이공에는 100여개의 애국단체, 통일 운동단체들이 수십개의 언론사를 양산하여 월남의 좌경화 공작에 앞장섰습니다. 목사, 승려, 학생, 직업적 좌경인사, 반전운동, 인도주의 운동 등 가능한 모든 운동체가 총동원되어 티우정권 타도를 외쳤습니다.

월남 패망 당시 월남에는 공산당원 9500, 인민혁명당원 4만명, 즉 전체 인구의 0.5% 정도가 월남 사회의 밑뿌리를 뒤흔들고 있었습니다.

반면 월남에서는 군사 쿠데타가 벌어질 때마다 대공 전문가들이 쫓겨나는 바람에 월남 대공기관과 정보기관은 형체만 남았습니다. 한 나라를 가장 쉽게 망하도록 하는 길은 그 나라 정보기관을 무력화시키는 것입니다.

197410, 월맹의 하노이에서는 닉슨 대통령이 사임되는 시점에 197518, 월맹군 18개 사단 총병력을 월남 공격에 투입, 월맹사령관은 자신이 극비리에 중부 월남으로 잠입한 사실을 기만하기 위해 하노이에서는 그와 비슷한 가짜 반띠엔둥이 볼가 승용차를 타고 매일 저택에서 월맹군 총사령부로 출퇴근을 했습니다. 거덜이 난 월남 정보기관은 이 사실을 까맣게 몰랐습니다.

가상의 평화에 눈이 멀게 했습니다. 유비무환을 잊었고, 군도 총체적으로 부패되고 있었습니다. 월남은 몇 개월 후의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극심한 혼란상을 연출하고 있었습니다. 각자의 정치승리를 위해 지역감정이 드샜고 분열이 심했습니다. 집권당도 분열했습니다. 고질적인 사회악이었던 뇌물과 마약, 매춘과 도박이 정치권의 혼란과 맞물리면서 전염병처럼 전국을 휩쓸었습니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군내 부정부패였습니다. 당시 월남 정규군은 58만명이었는데, 이 중에 10만명이 뇌물을 주고 비공식 장기휴가를 받아 대학에 다니거나 취업, 심지어 장군들이 운영하는 사()기업에 파견돼 무보수로 일하는 사례마저 있었습니다.

1975310일 새벽 2, 월맹 공산군이 중부월남에서 총공세를 감행했습니다. 각지에 분산 고립돼 있던 월남군은 곳곳에서 패퇴하여 밀리기 시작했습니다. 군대의 절반이 도망 중이고 월맹군의 포로가 되었다고 합니다.

1975421일 티우 대통령이 하야하고 재야 정치인 정반 민 예비역 대장이 대통령에 취임했습니다. 그때까지 미국은 대월(對越) 방위공약은 이행되지 않았습니다.

1975429일 월맹 공산군 14개 사단이 사이공을 포위했습니다. 사이공에는 패잔병들만 남아 있었다. 1975430일 정오가 지나서 월맹 국기가 사이공의 대통령궁에 게양되었습니다. 미국의 방위공약은 없었고 대신 사이공 함락 직전, 월남군 장성과 그 가족을 헬기에 실어 남지나해상의 항공 모함으로 철수시킨 후 미국으로 망명시켰습니다.

사이공 함락 후 월남의 군인·경찰·공무원·지도층 인사·정치인들, 반체제 운동을 벌이던 종교인, 학생, 민주 인사들도 모두 체포돼 인간개조 학습소에 수감됐고, 이 중 다수는 생사불명 상태가 됐습니다. 공산정권은 형무소가 모자라자 과거 월남군 부대시설을 형무소로 개조해 그곳에 죄수들을 수용하기도 했습니다.

그들의 수감 명목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체제 활동을 하던 자들은 사회주의 사회에서도 똑같은 짓을 할 우려가 있기 때문이란 것이었습니다.

보트 피플의 숫자는 약 106만명, 이중에 배가 전복돼 익사하거나 해적에게 살해당한 숫자가 11만명, 살아서 해외로 이주한 사람이 95만명.

비슷한 데자뷔는 우리에게

대한민국의 길을 묻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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